일기장에 끄적대다가 검은 줄을 찍찍 그어버리고 이리로 왔다. 수년 째 하루도 빠짐 없이 일기를 쓰고 있긴 하지만 누구를 만나 뭘 했는지만 적을 뿐 정작 무슨 생각을 하고 무얼 느꼈는지는 쓰기가 꺼려진다. 첫째로는 내 손글씨를 별로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고, 둘째로는 자물쇠 없는 서랍에 덜렁 놓여지는 노트 한 권에 내 머릿속을 기록으로 남겨 두려니 내 생각은 때론 들키기엔 좀 챙피하기 때문이다.
펜으로 쓰거나 터치 키보드를 누르는 것 보다 톡톡톡 소리나는 노트북 키보드를 두드리는 것이 좋다. 탁탁탁 내가 쳐내는 글자들이 허공에 날아가 박히는 걸 보는게 좋다. 뜸들이지 않고 두들기면 생겨나는 리듬이 신이 난다. 내 못난 글씨체와는 다르게 둥글둥글한 글씨도 예쁘다. 무엇보다 이런 별 것 아닌 생각들이 익명의 누군가에게 보여지는데에는 거리낌이 없다. 나 말곤 여길 자주 오는 사람도 없을 것이며 설령 누가 길을 잃어 들어온대도 이 수다가 흰 바탕에 검은 지렁이들로 밖에 보이지 않을 외국인이거나 이게 글자로 읽힌대도 금방 기억에서 지워낼 사람들이겠지. 그러니까 내 동생이나 우리 엄마가 이걸 보다는 것보다야 그들에게 잠깐 들키고마는 것이 속 편하다는거다. 대단한 이야길 하려는건 아니지만 한 집에 사는 식구에겐 보여주고 싶지 않은 것들이 종종 있으니까. 그리고 여기다 훌훌 털어놓은 다음에 하루나 이틀 지나 훅 불어버리면 글자들이 흔적도 없이 다 날아가버리는것도 마음에 든다. 속 시원하다. 휴지통에 꾸깃꾸깃 버려진 노트를 다시 펴 보는 것 보다야 쿨하지. 그렇게 쏟았다 버려진 이야기들이 몇 있다. 뭘 썼다 지웠는지 기억도 안난다. 지금도 아마 결국엔 그런 얘기를 할거다. 너무 사소해서 친구들은 흥미를 가져주지 않을테지만 그 얼굴에 대고 나 혼자 신나서 막 쏟아붓는 재미없는 얘기들.
일요일보다 더 일요일 같은 목요일에 이번주 처음으로 늦잠을 실컷 잤다. 깨었다 잠들었다를 반복하다 달게 잔 건 마지막 한 시간 정도 밖에 안된 것 같지만 어쨌든 열두시에 일어나 씻었다. 며칠만에 집에 들어온 동생이 학교 나갈 준비를 하면서 게으르다고 한 소리 했다. 굉장히 오랜만의 늦잠이며 지난 며칠 내가 얼마나 공을 들여 건강한 생활을 했는지 반박하고 싶었지만 잠에 취해서 못했다. 억울하다. 청소를 하고 빨래를 탈탈 털어 널고 치즈 한 장에 계란후라이 두 개를 올려 김치볶음밥을 해 먹었다. 난 매일매일 한 달동안 김치볶음밥만 먹어도 살 수 있다. 다른 건 죽을 쒀도 요거 하나는 먹을만하게 만들 줄 알아 천만다행이다.
사실 오늘 [시저는 죽어야 한다] 를 보러 가려고 했는데 어제 [비포 미드나잇] 을 보고 머리에 마음에 찌끄래기가 좀 남은 것 같아 말았다. 이런 조각들은 지들끼리 머리에서 마음에서 떠다니다가 어느 날 갑자기 분명한 모양을 하고서 떠오를 때가 있다. 그러니까 시간을 좀 주어야 한다.
저녁에 오랜만에 무네를 만났다. 차로 십오분이면 가는 곳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나는 굳이 술을 마시겠다고 차를 두고 나왔다. 어플을 보고 정류장 세 곳을 왔다갔다하며 버스를 기다렸지만 한 시간 동안 아무것도 오지 않았다. 신도시는 생기자마자 올 곳이 못 된다 정말로. 아무튼 정류장을 또 옮기는 중에 왠일로 택시가 한 대 눈에 띄길래 얼른 잡아 탔다. 택시와 버스는 내가 운전할 땐 적이지만 내가 타고 있을 땐 아저씨 화이팅 추월도 좋고 끼어들기는 공격적일 수록 좋다. 그렇게 택시를 타고 달리는데 꽃내음이 확 코를 찔렀다. 아카시아 향이라고 아저씨가 가르쳐주었다. 매일 오고가는 길이고 나도 여기선 꼭 일부러 창을 내리는데 이게 아카시아 향인 줄은 몰랐다. 내가 향에 취한 사이 아저씨는 그 시간 가장 차가 막히는 곳으로 갔다. 차마 미터기를 볼 수 없었다.
우린 두 달 전엔가 봤는데 그 새 두 달이나 지났다는게 믿겨지지 않았다. 누구와의 시간은 참 빨리 가고 다른 누구와의 시간은 더디다. 그 둘 사이에 좋고 나쁨은 없다. 어제 제시가 말한대로 시간이 아니라 인식일 뿐. 곧 졸업하는 무네와 현실을 한탄하다가 고3 때 얘기를 하며 까르르까르르 웃었다. 십 년을 울궈먹어도 웃기다. 그 때의 우리는 참 귀엽고 당돌했다. 그리고 오늘은 고3 때 처럼 먹었다. 먹고 수다떨고 먹고 수다떨고 지쳐서 포크를 다시 들 수 없을 때까지 미련하게 먹었다. 배부르다.
요즘 맥주를 많이 마신다. 집에서 혼자 저녁 먹을 때도 캔 하나 까놓고 홀짝홀짝 잘도 마신다. 반주는 무슨 맛에 하는지 도통 이해가 안되던 때가 있었는데 이게 다 영은이 언니 때문/덕분이다. 점심이고 저녁이고 여름이고 겨울이고 꼭 맥주 한 잔 같이 시켜 먹는게 신기해서 몇 번 따라하다보니까 이제 왠만하면 밥을 먹어도 물 보다는 맥주가 맛있더라.
언니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얼마 전에 있었던 재밌는 일을 하나 적어둬야 겠다. 음 난 시시콜콜한 얘길 하려고 연락하는 편은 아닌데 언니는 나보다 한 열 배 쯤 그렇다. 나는 페이스북을 안하고 언니는 카톡을 안한다. 언니의 블랙베리는 늘 고장이 난다. 한참 전에 연락했는데 답이 없길래 난 언니가 영국으로 들어가 버린 줄 알았다. 그래도 혹시 몰라 얼마 전에 한 번 더 연락했더니 나 맞냐고 묻는 답장이 왔다. 그렇게 다시 만나게 됐는데 일 년 만에 보는건지 이 년 만에 보는 건지 도통 기억이 나질 않았다. 그러니까 SNS가 차고 넘치는 오늘 이렇게 전화번호로만 연결된 사람들은, 특히 언니와 나처럼 나서서 먼저 연락하는게 서툰 사람들 끼리는, 연락이 끊기지 않으려 노력하지 않으면 서로 뭘하고 사는지 알아낼 길이 없다는거다. 나와 전혀 상관이 없는 다른 누가 오늘 점심으로 뭘 먹었는지 트위터로 인스타그램으로 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세상에서 SNS 테두리 밖에 있는 사람이 오늘 뭘했는가를 알고 싶으면 일부러 연락해야 하는데 그게 노력을 필요로 하게 됐다. 내 타임라인 밖에 사는 사람들에게 끊임없는 관심을 주는 것이 일종의 노동이 됐다.
암튼 언니와 평균 일년 반만에 만나 회포를 풀었다. 내가 보고 싶었다고 했다. 언니는 나보다 더 빈말을 못하는 성격이니까 진심이었으리라. 참 잘했어요 도장을 받은 것 처럼 기분이 좋았다. 언니는 내가 재미없는 얘길 해도 재밌게 잘 들어준다. 소리내서 웃지 않아도 재밌어 한다는걸 알 수 있다. 내 말을 들으면서 뻐끔뻐끔 담배 피우는걸 보는게 좋다.
다프트 펑크의 신보와 책 두 권을 주문했다. 한정판 구성이 마음에 안 들어서 일반판 풀릴 때 까지 기다렸는데 며칠 더 기다려야 받을 수 있다. 한정판을 일부러 피하기도 처음이다. 비가 찔끔찔끔 오는 날 운전하면서 The Game of Love 를 듣는데 갑자기 어디선가 너도 이 노래를 맘에 꼭 들어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기가 찼다. 시간이 그렇게 지났는데도 난 너의 취향을 기억하나 보다. 거르고 걸러진 찌꺼기도 시간에 밟혀 닳고 닳아 없어졌다고 생각했는데 보이지 않을 만큼만 옅어졌을 뿐이지 사라지진 않았었나보다. 내가 원하지 않는데도 문득문득 떠오르는게 싫다. 난 이제 니가 좋지도 않고 더는 밉지도 않다. 드디어 넌 내게 아무도 아닌 사람이 되었는데 불쑥불쑥 나타는게 끔찍하게 싫다. 나는 울보 유지태였고 너는 못된 이영애였다. 어떻게 변할 수가 있냐고 난리를 쳤다. 지금은 안다. 변하지 않는 건 아무것도 없더라. 한 자리를 지켜내는 건 아무것도 없더라. 결국엔 시간이 내 맘도 바꿔놨다. 니 마음이 변했을 때 내 마음도 바뀌었더라면 우리 둘 다 좀 수월하게 털어낼 수 있었을텐데.
기다리던 청첩장을 받았다. 다들 올해 안에 해치우기로 결심을 단단히 한 듯이 결혼식이 줄줄이 소세지다. 친구들도 똑같은 소릴 하는 걸 보니 올해 꽤 많은 스물 여덟 여자들이 유부녀가 되나보다. 무네는 노처녀가 된 것 같다고 했다. 결혼 계획이 전혀 없는 우리는 ‘축의금 절대 못 돌려 받겠지.’ 하고 앉았다. 독신을 결심한 친구의 친구는 마흔 살에 생일파티를 크게 할거라고 했다. 좋은 생각이다. 나도 따라해야지. 생일파티 크게 열어서 선물 잔뜩 사갖고 오라고 해야겠다. 마흔 살 생일파티에 누가누가 올까 궁금하지만 마흔 살이라는건 상상도 하기 싫다. 그만 생각해야지.
내일은 아침 일찍 병원에 간다. 뼈스캔을 한 번 더 하기로 했다. 뼈가 녹았을지도 모른다고 의사선생님이 겁을 줬는데 시바 될대로 되라 했다. 하지 말라는건 다 안하는데 나보고 뭘 더 어쩌란 말이야. 요즘 현대인이 앓는 질병 중 가장 핫하게 떠오르고 있는 턱관절 장애 때문에 병원에 다닌지 이제 구개월 정도 된다. 다음주 부터는 스플린트를 끼고 있어야 한다. 까딱하면 부작용도 있대서 걱정인데 이걸 안하면 더 나빠질거라니까 별 수 있나. 뼈스캔 할 땐 피 뽑는 자리에 주사를 한 방 맞는다. 이제 그 쯤은 거뜬하게 잘 맞는다. 채혈실이나 핵의학과 처럼 하루에 수십명씩 검사만 하는게 일인 곳에서는 엄살이 절대 안 통한다. 엄살 부리든 말든 바늘부터 찌르고 본다. 내일도 암말 않고 그냥 조용히 맞아야지. 그래도 귀 밑에 맞는 주사는 아직 용기가 안난다. 주치의 선생님이 이건 아프댔다. 선생님이 먼저 아프다고 하는 주사는 정말 아픈거다. 일단 장치 치료 시작하고 필요하면 맞자고 했으니까 스플린트가 마법을 부려서 제발 그 주사 만큼은 피해 갔으면 좋겠다. 진짜로 조물주가 있다면 만나서 따지고 싶다. 날 이렇게 겁쟁이로 만들거면 병도 주지 말았어야지. 장난하는거야 뭐야.
그리고 이 와중에 퍼렐 신곡 나왔다. 좋다.


















































